웨슬리(제2권) - 전자책

존 웨슬리의 신학적 전기및 회심으로서의 내적 발전

John Wesley: a Theological Biography, Vol. 1, From 17th June 1703 until 24th May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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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글 역자 서문
영문 역자 서문

제1장. 복음주의 운동의 태동: 헤른후트 형제단
독일에서 런던으로 돌아옴—신앙회에서의 공동사역(—페더 레인 신앙회—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의 본질적 특성—존 웨슬리와 옥스퍼드—존 웨슬리의 내적 감동과 자기비판—우울하고 불안한 일들—조지 휫필드—존 웨슬리의 찬송가 사역—기도모임에서 나타난 민감한 현상들—헤른후트파 형탸를 거부함—조지 휫필드가 존 웨슬리를 초청함—그 당시 도시의 특성—자유로운 하늘 아래서의 옥외 설교—토지 매입과 새로운 집회소 건립: 복음주의 운동의 중심지로서의 브리스톨—존 웨슬리와 휫필드와의 댜립: 예정론—제임스 허비와의 논쟁: 교구제도 문제—에드문드 깁슨 주교와의 만남—존 웨슬리 런던으로 돌아옴—존 웨슬리의 모친이 복음주의 운동에 가입함: 헌팅돈 백작 부인과의 교제—필립 하인리히 몰터가 페터레인 신앙회에 나타남—몰터의 추종자들에게서 이탈: 1740년 7월 20일—헤른후트파에 보낸 긴 편지: 1740년 8월 8일—마리엔 보른에서 보내 온 진젠돌프의 답신—존 웨슬리가 자기 주장을 조정함: 1740년 2월 24일과 3월 5일—페터 뵐러 및 스팡겐베르그와의 대화: 1941년 5월 2일—존 웨슬리의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 거부—런던 그레이스 인 정원에서 진젠돌프와 절교하는 담화: 1741년 9월 3일—절교의 원인이 된 교리적 대립: 구원의 법작 근거, 혹은 결과—헤른후트파 사람들과의 계속되는 관계 및 리차드 비네—존 웨슬리와 헤른후트파 사람들과의 관계 악화: 1750년—Acta Fratrum Unitas in Anglia에 대한 논평—30년 동안(1753—1786)의 접촉과 화해 시도

제2장. 복음주의 운동의 과정
병상에서도 일하는 존 웨슬리—콘월, 웨일즈, 뉴캐슬에서—엡워스에서—런던과 브리스톨에서 거주하면서 사역—다시 엡워스에서: 롬리 목사가 웨슬리의 성찬식 집례 반대—런던의 웨스트 스트리트 체풀을 구입하고 예배드림: 1743년 5월 29일—콘월—웨일즈에서 호웰 해리스의 초청을 받음: 1939년 10월 15일—아일랜드—스코틀랜드—랑겔 박사의 신대륙에서의 메[도디스트 운동—메도디스트 운동의 기복

제3장. 메도디스트 운동의 창시자 존 웨슬리
메도디스트 운동의 기초인 설교와 목회—모임과 속회, 반과 대의 조직—1743년 2월 23일에 제정한 규칙들—1744년 12월 25일에 내린 지침—원시 기독교와의 비교—평신도 설교자와 평신도 협력자—1744년 6월 이후의 회의들—존 웨슬리의 권위에 대한 거부—영국 국교회 개혁을 위한 요청: 1755년 8월 1일—설교자들의 내적 형태: 윌리엄 홀더—설교자들의 내적 형태: 엘리자베스 존슨(

제4장. 존 웨슬리와 국교회의 관계
동료로서의 웨슬리의 특수 위치—교회 고위층과의 문제점—제임스 허비와의 논쟁: 교구제도 문제—영국 구교회와의 지속되는 관련성—빈센트 페로네트에게 보낸 편지: 화해를 위하여—분리에 관한 물음—영국 국교회의 개혁 및 발전된 형태로서의 감리교회—준 웨슬리를 통한 독립성 포기 거부: 1757년—준 웨슬리에게 감독직을…?—영국 국교회의 헌법—신대륙 북아메리카를 위한 런던 감독과의 공동사역: 1780년—분리에 반대하는 요약된 문서: 1758년—영국 국교회에 대한 웨슬리의 관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상황을 위한 모델

제5장. 반대당
집단적 저항이 시작됨: 1741년 런던 교외에서—웨스버리에서: 1743년 5월 21일—문서들을 통한 공격: 1739년 이래—공격의 대상이 된 존 웨슬리의 보수적 정치적 입장: 특히 1775년 신대룩 식민지 문제—평신도 설교자에 대한 모함—무례하고 심술궂은 인신공격—교회적, 신학적 공격—예민한 사람들의 저항: 도덕적 주간지들—토마스 루터포드의 공격—토마스 휘스톤의 반박—‘광신주의’라고 고발한 조지 레빙턴—윌리엄 와버튼의 공격—이에 대한 존 웨슬리의 반응—터커에 대한 답변—영국은 기독교 국가인가?—에드먼드 깁슨 주교와의 논쟁—깁슨에 반박에 대한 존 웨슬리의 답변—존 스미스와의 서신을 통한 토론—존 다운즈에게 보낸 존 웨슬리의 대답—와버튼에 대한 대답—모든 공격들의 유사성—캔터버리 대주교의 입장

제6장 설교자로서의 존 웨슬리
교리설교들—에베소 2:8에 대한 설교, “믿음을 통한 구원”—사도행전 26:8에 대한 설교, “거의 그리스도인”—사도행전 4:31에 대한 설교, “성서적 기독교”—신생에 대한 설교들, 요한복음 3:7에 대하여—요한복음 3:8에 대하여 “신생의 특징들”—요한일서 3:9에 대하여 “거듭남의 위대한 특권”—“성령의 열매”에 대한 설교들—의인과 거듭남<요한일서 3:9에 대한 설교, 거듭남의 위대한 특권에서>—산상수훈에 대한 13편의 설교—산상수훈에 대한 설교들에 나타난 의인의 의미—빌립보서 3:16에 대한 설교, “그리스도인의 완전”—로마서 3:31에 대한 이중설교, “율법에 대한 믿음의 관계”—창세기 6:5에 대한 설교 “원죄”—윤리적 주제들에 대한 설교: “돈의 올바른 사용”<눅 16:9>—고린도전서 7:35에 대하여, “오락과 방심”

제7장 신학적 저술가로서의 존 웨슬리
존 웨슬리의 저술 방식과 저술 종류—1742년의 팜플렛, “메도디즘의 특성”—1743년의 “합리적이고 경건한 인간에 대한 진지한 외침”—“통찰력 있고 경건한 사람들에 대한 더 발전된 외침”—1757년의 논문, “원죄”—1766년의 논문,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평이한 이야기”—“기독교 문고”—1786년, “존 윌리엄 플레처의 전기—기타 주제들—웨슬리의 윤리적 저술들. 노예제도에 관하여—루터와의 비교

제8장 목회자로서의 존 웨슬리
압도적인 의미, 전제로서의 영혼 관찰—신경질적 발작—임종의 자리에서—완고함과 지혜—진지함—목회에 나타난 기독교적 완전—1756년 이래 여인들과의 목회적 서신 교환—찰스 웨슬리와의 서신 교환—플레처와의 서신 교환—부인과의 서신교환, 그의 부부관계—자신의 영혼에 대한 목회—요약

제9장 교육자로서의 존 웨슬리
신앙회의 출발점과 본보기—첫 킹스우드 학교—두번째 킹스우드 학교—예나의 본보기—하루의 일과—수업과 교과서—원칙들, 루소에 대한 저항

제10장 전체적으로 본 존 웨슬리
폐쇄성—첨예화된 교리물음—사역의 성과—고독—존 웨슬리의 교회사적 상황과 유일회성—원시 기독교적 입장 전체를 다시 획득함—현대성과 전통의 각축—문화적 편협—금욕적 특징—죽음—토마스 코크의 추모사에 나타난 그의 평생 사역의 메아리—조셉 벤슨의 추모사—리처드 로다의 추모사—사무엘 브래드번의 추모사—존 화이트헤드의 추모사—민중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한 전단—삶의 완성으로서의 거룩

참고문헌
주(註)


저자 소개

저자 마르틴 슈미트(Martin Schmidt) 교수는 저명한 역사신학 교수로서 하이델베르크 대학, 베를린 대학, 마인쯔 대학에서 역사신학 강의를 했다. 그는 일찍이 학생 시절부터 존 웨슬리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1934년에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메도디스트 신학교에서 웨슬리 연구에 몰두했다. 바로 그 때는 히틀러가 주도하는 나치주의자들이 ‘독일적 기독교 운동’을 야단스럽게 선전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세계교회 일치 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존 웨슬리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던 슈미트 교수의 고귀한 뜻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의 박사학위 논문도 존 웨슬리와 루터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3년에서 1954년 사이에 메도디스트파에서 설립한 영국 리치먼드 대학교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웨슬리 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는 독일 경건주의와 웨슬리에 관한 논문을 남기고 1958년 5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역자 서평

이 책은 마틴 슈미트의 저서 『John Wesley』(Gotthelf Verlag, 1953)을 번역한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신학적 전기, 회심을 향한 내적 발전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저자는 저명한 역사신학 교수로서 하이델베르크 대학, 베를린 대학, 마인쯔 대학에서 역사신학 강의를 하였다. 일찍이 그는 학생시절부터 존 웨슬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1934년에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메도디스트 신학교에서 웨슬리 연구에 몰두하였다. 바로 그때는 히틀러가 주도하는 나치주의자들이 ‘독일적 기독교 운동’을 야단스럽게 선전하였던 시대였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세계교회 일치 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존 웨슬리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였던 슈미트 교수의 고귀한 뜻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의 박사학위 논문도 존 웨슬리와 루터에 관한 것이었다.

저자는 세계 제2차 대전 후인 1953년에서 1954년 사이에 메도디스트파에서 설립한 영국 리치먼드 대학교 객원 교수로 있으면서 웨슬리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그는 독일 경건주의와 웨슬리에 관한 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기고 1958년 5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의 저서 『John Wesley』에서 웨슬리의 생애에 있었던 사건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웨슬리의 생애와 그의 신학을 연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책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존웨슬리는 감리교회의 창시자이며 교회사 및 기독교 사상사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위대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였고, 웨슬리의 메도디스트 운동은 기독교계의 혁신적인 사건이라고 보았다.
저자 슈미트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존 웨슬리의 신앙과 신학의 발전을 내적으로 추구하여 회심사건을 그 정상에 올려 놓았다. 더욱이 웨슬리의 내적 발전 과정에 있어서 그에게 영향을 끼친 영국 정신사에 관하여, 그리고 그에게 종교개혁의 신앙을 부여한 루터파 독일 경건주의에 관하여, 각각 그 자료에 입각하여 그 관계 상황을 자세히 논술한 일은 매우 특징적이다.
많은 전기 저술가들은 웨슬리의 조지아 선교는 실패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슈미트 교수는 웨슬리의 조지아 경험은 그 후에 있었던 그의 힘이라는 일회적 사건의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과 조지아에서 있었던 그의 고뇌와 환난 등은 마치 루터가 수도원에서 경험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웨슬리에게 부여한 영적 시련이었다는 사실을 웨슬리의 일기와 서신으로 뒷받침한 일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웨슬리는 목사로서의 그의 임무의 실패와 인간으로서의 고뇌에서가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하나님과 구원이라는 문제로 부터 심각한 영적 시련을 받았던 것이며, 그것은 웨슬리에게 있어서 율법과 죄에 대한 끊임없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은 때로는 웨슬리 앞에서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셨고 때로는 당신의 얼굴을 숨기셨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하여 웨슬리는 회심이라는 높은 봉우리를 향해 한 걸음 한걸음 올라갔던 것이며 웨슬리는 피터 뵐러가 회심이 돌연적으로 시작된다고 말한 것에 동의할 수 없었으나 웨슬리의 회심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의 낭독을 듣는 일에 의하여 돌연히 시작된 것이ㄹ았다. 그의 회심 사건은 고독한 만남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자기 자신의 의와 신앙으로 말미암아 의, 율법과 은총 사이의 바울적 대립 아래 있었던 웨슬리가 회심으로 인하여 신앙의 확신을 얻었다는 일과 그 확신을 그에게 준 것은 웨슬리가 오랜 시간에 걸쳐 매일 매일 읽었던 신약성서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슈미트 교수의 저서 『John Wesley』에서 저자는 웨슬리의 회심까지의 생애를 각각 그 단계에 있어서 그의 내적 발전을 더듬어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그 전체의 모습을 그렸다는 점도 특징적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른 웨슬리 전에서 볼 수 없었던 내용의 풍부함과 신학적 신앙적 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슈미트 교수의 『John Wesley』는 제1권과 제2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은 웨슬리의 회심까지의 내적 발전을 새로운 신학의 빛으로 조명하였고, 제2권은 헤른후트파와의 결렬과 영국 국교회 안에 있어서의 메도디스트 신앙회의 설립과 조직 규례, 설교와 신학이 그 내용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