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 True And False Repentance

16세기 종교개혁자 존 웨슬리의 중생에 대한 명저서




웨슬리가 말하는 중생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웨슬리가 말하는 중생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사건이다. 웨슬리는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영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따라서 타락 이후의 인간은 육, 혼, 영의 세 요소 가운데 처음 두 요소만 간직하고 있으며, 결국 인간의 삶은 육의 세력에 의해서 지배된다(웨슬리의 『약주』 살전 5:23 참조). 그런데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다시금 거듭나게 되며, 거듭난 사람 속에는 타락 이후 상실되었던 하나님의 영이 다시금 역사하게 되어 삶 전체를 영이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중생은 영적인 감각의 회복이다. 육체에 오관이 있어서 외적인 사물을 인식하듯이 영혼에도 감각이 있어서 영적인 것들을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영적인 감각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되었다. 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이런 상실되었던 영적인 감각이 다시금 회복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도 맛보게 되고, 영적인 음성도 듣게 되며, 영안이 열려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의 말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셋째로 중생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중생으로 인해서 타락으로 인해 상실되었던 하나님의 형상 특별히 도덕적인 형상이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인간은 다시금 하나님과 바른 교제를 갖기 시작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맛보기 시작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부패성이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 대신에 원죄의 부패성이 자리잡게 되었으나, 중생으로 말미암아 부패성이 붕괴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넷째로 중생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양자의 사건과 함께 일어난다. 구약성경에서는 할례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외적인 할례가 아니라 내적인 할례, 즉 중생이 요구된다. 즉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면 중생한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 중생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이제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넘치게 된다. 이제 모든 과거의 죄로 인한 벌에서 해방되었고, 영원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게 된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분명한 회심의 체험, 즉 중생을 강조했다. 1907년의 대부흥 운동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가는 동안 한국교회는 많이 형식화되고 제도화되었다. 근대 복음주의가 가장 경계했던 것이 바로 이런 형식적인 신앙이다. 웨슬리의 중생에 대한 설교는 이런 형식적인 신앙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핵심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많은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이 웨슬리의 중생에 대한 설교를 읽고 참다운 기독교인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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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The New Birth)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7) 기독교의 모든 교리 가운데 가장 “근본적”(Fundamental)이라고 적절히 정의될 만한 어떤 교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다음 두 가지 교리, 즉 칭의와 신생의 교리일 것입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for us)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가운데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신생은 우리의 타락된 본성을 다시 새롭게 하시기 위해 우리 안에서(in us) 행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 신생의 근거는 이 세상의 창조 만큼이나 심오한 데에 놓여 있습니다. 창조를 설명하고 있는 성경말씀을 읽으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창 1:27).
즉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Natural Image)을 따라, 하나님 자신의 불멸성을 투영시킨 반사체로서 창조되었으며, 영적인 존재로서 이해력, 자유 의지, 그리고 여러 다양한 감정들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정치적 형상(political image)을 따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는”(창 1:28) 이 지구상의 통치자로서 창조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moral image)을 따라 창조되었는 데, 사도 바울에 따르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엡 4:24)입니다. 결국 인간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자연적, 정치적, 도덕적 형상을 따라 창조된 것입니다.

창조하신 것이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9). 그러므로 태초에 창조된 남자와 여자는 사랑으로 충만했고, 이 사랑은 그들의 모든 성질과 생각들, 그리고 말과 행동에 있어서 유일한 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와 자비, 그리고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본래 이런 창조자의 손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흠없이 깨끗하신 분이시기에, 인간도 역시 태초에는 모든 죄된 더러움으로부터 정결한 존재였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손으로 지으신 다른 모든 피조물처럼 “심히 좋았더라”(창 1:31)라고 선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인간 창조가 죄에 의해 해를 당하고, 의와 참된 성결이 충만치 못했다면 이런 축복의 말씀, 즉 “심히 좋았더라”는 선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점을 회피할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어떤 지적인 피조물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의롭지도 않으며, 거룩하지도 않다고 하면, 우리는 분명히 그 피조물을 선한 것이라고 선포할 수 없으며, 더우기 “심히 좋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적인 죽음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그들은 이제 굴욕적인 공포의 힘에 짓눌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 거의 갖고 있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편재하신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창 3:8) 숨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지식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매우 심도있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없이는 하나님의 형상도 더 이상 생명력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부정하고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부정과 불행 때문에, 공허함 속에 남겨진 채로,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기 보다는 마귀의 형상에 더 가까운 자기 교만과 아집으로 더욱 더 빠져들게 되었으며, 멸망할 짐승의 형상인 관능의 욕구와 정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을 따르고 있는 우리이것은 아담의 죽음 가운데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미 아담으로부터 난 모든 인간들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연적 결과는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영적인 죽음의 상태로 왔다는 것입니다. 즉 이 죽음은 하나님께 대한 죽음이며, 죄 속에서의 온전한 죽음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완전히 공허한 상태이며,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상실한 상태이고, 본래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내재해있던 모든 의로움과 거룩함이 상실된 상태입니다. 이런 것들 대신에 우리 모두는 교만과 아집에 사로잡혀서 죄의 힘에 짓눌린 채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우리들은 마치 짐승들처럼 감각적 욕구와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신생이 꼭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반드시 거듭나야 할” 죄악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여자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신생의 의미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신생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두번째 질문이며,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가볍게 다룸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것에 모든 가능한 주의를 기울여서 검토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 깊숙이 사고하면서,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와, 어떻게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지 명백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것이 어떻게 행해지는가에 대해서 세심하고도 철학적인 설명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어떤 기대도 하지 못하도록 바로 다음 구절의 말씀을 통하여 충분히 알려주셨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해 아래 있는 가장 현명한 자라도 모든 자연 속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명백하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8에 보면 “바람이 임의로 불매” 즉 바람은 당신의 힘이나 지혜에 의해서 부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당신은 절대적으로 틀림없이 바람이 부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그 어떤 사람도 바람이 어떻게 시작하고 끝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솟아오르고 가라앉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원리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마치 바람이 부는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당신은 절대적으로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을 확신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움직이는지에 대해서 당신이나 그 어떤 현자라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이 우리의 영혼 가운데서 어떻게 운행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호기심과 비판적인 탐구에 빠지지 않고서도 이성적인 그리스도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얼마든지 우리는 신생의 본질에 대한 분명한 성서적인 해답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답은 구원을 바라는 그 어떤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만족시켜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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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 John Wesley, 1703.6.17~1791.3.2

영국의 종교개혁자 ·신학자. 감리교의 창시자. 사람들에게 종교적 체험과 성결한 생활을 역설하고,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하여 대규모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감리교의 창시자. 잉글랜드 링컨셔 출생. 영국 성공회의 주교 S.웨슬리의 15째 아들로, 옥스퍼드의 그리스도교대학에서 수학한 뒤,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다가, 1729년에 대학으로 돌아가, 동생 찰스 웨슬리가 중심이 된 학생신앙단체인 ‘신성(神聖)클럽’의 감리교회 운동과 관계를 맺는 한편, W.로 등의 신비주의 저서에 심취하였다. 1735년 동생과 함께 미국 조지아주(州)의 선교사로 건너갔는데, 그 동안에 모라비아 교도들의 신앙에서 크게 감동을 받고 전도에 힘썼다.

그후 독일 경건파인 모라비아 교도의 집회에서 마침내 뜨거운 회심(回心)을 경험한 후, 모라비안의 본거지인 독일의 ‘헤른포트 형제단’을 방문하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을 벌였다. 사람들에게 종교적 체험과 성결한 생활을 역설하며, ‘그리스도교인의 완전’을 설교하는 한편, 당시 전 영국 사회에서 번지던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하여 대규모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이 그가 죽은 뒤 감리교회로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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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서론
1. 신생(The New Birth)
2. 성령의 처음 열매들(The Firstfruits of the Spirit)
3. 종의 영과 양자의 영(The Spirit of Bondage and of Adoption)
4. 신생의 표적들(The Marks of the New Birth)
5.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On Working Out Our Own Salv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