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렌 W. 위어스비의 예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탐구하자! 거기에는 우리가 그분을 믿어야 할 모든 의미가 들어있다.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바른 이해는 바른 신앙을 낳는다!




세익스피어의 유명한 연극에는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이같이 질문하고 스스로 답하는 장면이 있다.
“이름 속에는 무엇이 있나요? 우리가 장미로 부르는 것은 다른 낱말로도 그처럼 달콤한 향기를 낼 텐데요.”

그럴 수도 있다. 줄리엣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과 나와 로미오는 식물이 아니라 사람들이며,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무엇인지 안다. 이름은 각각 분명히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바꾸기 위해 법정에까지 가겠으며, 왜 많은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의 이름을 선택하기 위해 고심하겠는가? 어린 시절에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우리 부모가 우리에게 지어 준 이름에 대해 불평하고, 누군가가 우리에게 별명을 지어 준 것을 고마웠을 수 있다. 때로 상대방의 이름을 가지고 농담을 하는 것은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없다.


성경의 세계로 들어갈 때 이름들은 특히 중요하다. 하나님은 첫 사람을 “아담”으로 부르셨는데, 그것은 그가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창 1:26-27―히브리어로 “아담”은 “땅”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는데, 후자는 “열국의 아비”를 의미하는 것으로(창 17:5-8) 그 족장을 묘사하기에 완벽한 이름이었다. 하나님께서 연로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그들이 아들을 낳을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웃었다. 그래서 그들의 아들은 “웃음”을 뜻하는 “이삭”이라 불렸다(창 17:19; 21:1-7).

예수님은 시몬의 이름을 “반석”을 의미하는 “베드로”로 바꾸셨다(요 1:40-42). 그 당시에 덩치 큰 어부는 정처없는 모래에 더 가까와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가진 잠재력을 보고 그를 도와 그의 새로운 이름에 걸맞게 살게 하셨다.

그렇다. 성경의 세계에서 이름들은 차이를 지니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름들은 우리 주님과 관련된 이름들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예수”는 히브리 이름 , “여호수아”의 헬라어 어형이며, 둘 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를 의미한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호칭들이 수 백개 나오며, 그 각각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이중으로 계시한다. 그가 지니신 각 이름은 그가 베푸시는 축복을 가리키며, 우리는 믿음으로 이 축복을 누릴 수 있다.

…그의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다. 이것은 삶의 차원들과 관계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하는 일이 영원에 속하게 된다. 삶의 주권이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있을 때, 그를 통하여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삶이 우리의 것이 된다…그의 이름은 평강의 왕이다. 이것은 사람의 훼방들을 처리한다. 삶의 폭풍우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내적인 평강을 갈망하는가. 위협적인 세상에서 마음의 안정과 자신감을 얻는다면 우리가 무엇인들 주지 않을까. 그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 평강의 왕이시다. 그가 우리의 삶의 주권을 맡으실 때, 그는 우리에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을 주신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실 때,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기 시작한다(롬 5:17). 예수님은 보좌를 버리도록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되면 개성도 능력도 없는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요구하시는 전부는 그에게 우리와 더불어 그 보좌에 앉으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삶의 도전들을 대응하며,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삶의 목적들을 성취할 수 있다. 예수님은, 마치 우리가 생명없는 로보트인 것처럼, 우리를 대신하여 그것을 하지 않으신다. 또 마치 우리가 한 것은 가치가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그것을 다시 행하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울이가 예배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에게 순종할 때, 우를 통하여 그것을 행하신다.

이 책 첫 부분의 다섯 주제는 원래 틴데일 하우스에서 His Name Is Wonderful이란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은 현재 절판되었으나, 수년간 많은 사람들이 그 연구들에 대한 사의(謝意)를 표현해 왔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포함시키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무엇보다 그것들은 우리 주님의 가장 중요한 이름 다섯을 다룬다.

둘째 부분의 연구들은 원래 라디오 방송으로 하였으며, The Wonderful Names of Jesus란 책자로 출판되었다. 나는 그것들을 수정하고 확대하여 이 책을 만들었다. 그러나 라디오 방송의 비형식적인 스타일은 보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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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자(시 77:14).

: “그 이름은 기묘자라…” 이것은 삶의 권태를 제거한다. 왜냐하면 “주는 기사(奇事)를 행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적어도 인류의 죄악의 반”은 권태를 두려워한 데서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아마 이것은 어른들이 짓는 부류의 죄들을 왜 아이들은 짓지 않는지를 설명해 줄 것이다. 이는 대개 아이들은 기사(wonders)로 가득한 세상에 살기 때문이다(이하에서 기사는 의미의 보다 분명한 전달을 위해 동의어인 경이로움으로 번역함을 밝힌다―역주). 아이는 나비가 꽃 위에 앉아 있는 것이나 물고기가 연못에서 헤엄치는 것을 유심히 쳐다볼 수 있고 지극히 만족할 수 있다. 예수님이 어른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라고 경고하셨을 때, 그는 아마 이것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현대 과학의 기적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권태를 느끼고, 몇몇 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그 정도가 심하다. 인구 팽창 문제가 우리에게 심각하다. 그럼에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고독과 권태로 인해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 도시에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럼에도 마음은 공허하다. 헨리 데이빗 쏘로우(Henry David Thoreau)는 도시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외로운 곳”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자극적인 전자 공학의 신기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삶이 흥미로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삶은 단조롭고 지루할 뿐이다. 그들은 새로운 장난감을 찾으나, 신기함이 주는 놀라움이 식어 버리면 다시 옛 상태로 돌아간다. 확실히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

모사
“그 이름은…모사라.” 이것은 삶의 결정들을 지도한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시 73:24).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최상의 모사, 즉 상담자(counselor)이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친구들이나 전문 상담가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유익하기도 하나, 그 보다 우선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께 이야기하고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가 “모사”로 불리는 바로 그 사실이 삶의 결정들을 내리는 데 있어 우리를 돕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리스도―자격있는 모사
예수 그리스도가 “모사”로 불리시는 것은 그가 우리를 상담할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그런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필요한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전문 상담가로서 자신을 광고한다면, 그것은 위법이다.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고 조언할 만한 능력이 있다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자격증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교육과, 훈련받은 상담가의 지도 하에서의 실습과, 공적인 시험을 통과함으로 입증되는 그 분야에서의 실력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우리는 영적인 상담자가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상담자가 되시기에 완전하게 자격을 갖추고 계시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의 상담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상담할 수 있다. 우리를 상담하는 것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사역에 속한다.
그는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상담한다.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시 119:24).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를 생각해 보라.
font color=#228b22>“주의 계명이…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니이다…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시 119:98-100).
우리는 다른 이들이 어려운 “시련의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것을 말씀에서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죄의 쓰라린 결과를 고통스럽게 겪음으로써 배울 필요가 없다. 우리는 말씀에서 배우며, 죄를 피하고, 그로 인해 현명해질 수 있다.

우리의 상담자는 우리를 지도하기 위해 종종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잠 27:9). 이것은 신자들의 지역 모임에서 나누는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축복에 속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권고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지혜로운 상담자들에게만 귀를 기울이도록 주의해야 한다. 르호보암 왕은 그의 젊은 신하들의 말을 들음으로써, 그 자신과 그의 왕국에 비극을 가져왔다(왕상 12).

우리의 상담자는 그의 말씀으로, 그의 영으로, 삶의 환경으로, 그리고 우리가 교제하는 신자들을 통해 우리를 지도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조언하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기꺼이 그가 말씀하시는 바를 행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하나님은 호기심이 많은 자들이나 부주의한 자들에게 그의 뜻을 알리시지 않으신다. 그는 관심있고 성별된 자들에게 그것을 알리신다. 몇몇 신자들은 “하나님께 그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물어 본 다음, 그것이 내 마음에 들면, 내가 그것을 하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그 결과는 뻔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만약 우리가 실로 진지하게 하나님의 조언을 알고 동시에 그것을 행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의 뜻을 우리에게 알리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조언을 구해야 한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1-5).

제2주 하나님의 이미지

하나님의 이미지들과 이름들의 확대
출애굽기에 모세가 산위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 이 구절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무한히 많은 면을 지니고 있어서 각각의 면이 위대하신 야웨의 각기 다른 이미지나 이름을 반영하는 프리즘으로 상상하게 했습니다. 하나의 이름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지만, 각각의 이미지는 우리의 기도를 인도해줄 수 있습니다.
슬프게도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구하고자 하는 진실한 바람이 없이 영적인 조언을 얻기 위해 나에게 왔다. 그들은 참을성이 없었고, 내가 미리 다 꾸려진 계획의 보따리를 그들에게 건네주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가지신 지혜를 부지런히 찾기 위해 성경 연구나 기도에 기꺼이 시간을 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삶의 표면에 떠있는 진리의 파편들을 얻기를 기대할 뿐, 감추어진 보화를 캐내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조언을 사모하고, 그것을 찾고, 그것을 기다리라. 이스라엘이 거듭 거듭 불순종에 빠진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시 106:13). 선생은 학생에게 산수를 가르치고 바로 그의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학교에서 우리의 상담자는 우리가 그 대답을 들을 만한 준비가 되기까지 기다리신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하나님의 지연은 하나님의 축복을 위한 준비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가 우리에게 하도록 말씀하신 바를 계속하여 행하며, 인내로 기다리라. 우리의 은혜로우신 상담자는 결코 우리를 그릇 인도하시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가 참지 못하고 충동적이 될 때 우리 스스로 그릇된 길을 가게 된다. “믿는 자는 급절(急切)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주님이 그의 뜻을 알리실 때, 감사함으로 받으라. 그것에 대해 논쟁하지 말라. 주님께 그것을 바꾸시도록 요구하지 말라. 다른 의견을 구하지 말라.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든 그냥 받으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비판적인 승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순종을 위해 주어진다. 우리가 전적으로 불만족하더라도, “환불 보장”은 없다.

제3장 전능하신 하나님

그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이것은 삶의 요구들을 처리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눅 1:49).

인류의 역사는 힘을 발견하고 응용한 이야기이다. 처음에 그것은 인력이었으며, 그 다음에 마력, 증기력, 전력, 지금은 원자력으로 발전되었다. 각 단계마다 인류를 물질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도 부유해졌는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우주의 힘을 이용할 수 있으나, 우리 자신들을 통제하거나 이기적인 사람들이 세상과 그 사람들을 파괴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부딪힐 때 여전히 유약하다. 몇몇 미래 역사가들은 20세기의 후반부를 “힘과 연약의 시대”(the age of power and weakness)로 부를 것이 틀림없다.

오늘날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힘은 영적인 힘이며, 그 힘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리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톨스토이(Leo Tolstoy)는 “나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음을 믿는다. 그를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은, 나에게 있어, 가장 큰 신성모독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주장하셨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 하느니라”(요 5:23). 선한 목자에 대한 그의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담대하게 말씀하셨다(요 10:30).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 말을 신성에 대한 분명한 주장으로 이해하였고, 따라서 그를 돌로 치려하였다.

그의 공적인 사역을 마감할 무렵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조금 전에 예수님은 이렇게 외쳤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 12:44-45). 그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다(요 14:9). 단순하고 쉬운 말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주장하셨다.

그를 안 자들은 그가 하나님이심을 단언하였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밝혔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도마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경배하며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외쳤다(요 20:28). 예수님은 그의 말을 시정하지 않으셨다. 다소 출신 사울은 나사렛 예수가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거세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열정적이던 랍비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남은 여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언하며 보냈다. 바울은 그의 민족 이스라엘에 관해 말할 때 이렇게 썼다.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5). 디도서 2:13에서는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어떤 사교의 신자가 어느 날 나에게 “성경에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부르는 구절이 한 구절도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히브리서 1:8을 펴서 보여주었다. “아들에 관해서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그 사람의 대답은 거짓된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원문을 왜곡한 또 다른 성경 번역본을 언급할 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사도 요한은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말하였다(요일 5:20). 헬라어 학자가 되어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을 주장하였고, 다른 이들의 고백에서 그 주장을 받아들이셨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예배를 받으셨다. 그는 또 죄를 사하는 것과 같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들도 하신다고 주장하셨다(눅 7:49).

그가 지니신 그 이름들이 그의 신성을 확증한다. “예수”란 바로 그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를 의미한다.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 동일한 이름을 지녔을지라도(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를 따라), 예수님만이 실제로 그 이름에 맞게 사셨다. 그는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셨다(눅 19:9). 그가 중풍 병자의 죄를 사하셨을 때, 종교 지도자들은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라고 하였다.

자기의 임무가 거룩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화가들은 전통적인 정교회 이콘을 만듭니다. 그들의 작업은 그들 자신의 재능과 관련되기보다는 그들의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콘을 그리기 전이나, 그리는 동안 많은 시간을 기도하고 금식하며 보냅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제시되는 형상들의 크기와 균형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종종 코가 길고, 귀가 크고, 입은 작습니다. 손은 크고 손가락들은 깁니다. 아기 예수는 어른이나 노인으로 묘사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물들의 배경은 단순히 엷게 채색되거나, 아니면 비현실적으로 표현된 풍경이나 방일 수도 있습니다. 이 기법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자연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끌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의 이름 중 하나는 “임마누엘”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를 의미한다(마 1:23). 천사는 마리아에게 그를 가리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하였다(눅 1:35). 마리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구하였을 수도 있는 유일한 증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십자가 밑에 서서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왜 마리아가 침묵하였는가?


그리스도의 권능

예수님은 하나님으라 불릴 뿐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린다. 구유 속의 갓난 아기가 전능하다고 불리다니 무슨 역설인가. 그럼에도 갓난 아기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권능의 중심이었다. 그의 탄생은 천체에 영향을 미쳐 찬란한 별이 나타나게 하였다. 그 별은 동방박사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들은 그들의 고국을 떠나 예루살렘까지 길고 위험한 여행을 하였다. 새로 탄생한 왕에 대한 그들의 고지(告知)는 헤롯과 그의 궁정을 소란케 하였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늘에서 천사들을 내려오게 하였고 들에서 양을 치던 소박한 목자들도 불러들였다. 주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나타났을 때, 한밤중이 대낮처럼 환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주의 창조에서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본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그렇다면, 그가 만물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자신은 창조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성경에서 이것을 가장 위엄있게 진술한 곳은 히브리서 1:1-3이다.
…예수님은 창조에서 뿐 아니라 역사(歷史)에서도 그의 권능을 나타내신다. 베들레헴 약속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

그의 전능하신 능력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용 가능하다. 바울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한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9-11).
이 기도에 있는 전칭적 요소들을 주목하라. 모든 지혜, 범사에 기쁘시게, 모든 선한 일에, 모든 능력.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능력”으로 채우신다면, 우리가 바로 전능하게 된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능하시다는 것을 믿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이 속성을 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에 불과한 그의 백성에게 부여하는 데는 믿음의 큰 도약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이용가능하다.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우리가 끝내는 무엇이 아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사역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다. 그는 완전한 구원을 베푸신다. 그가 “일시불로 얼마를 지불하고” 우리가 나머지를 월부로 갚아야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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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1부 이사야 9장 6절에 나온 예수님의 이름
1 . 기묘자
2. 모사
3 . 전능하신 하나님
4. 영존하시는 아버지
5. 평강의 왕

제2부 신약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이름
6. 나사렛 사람
7 . 개척자
8 . 목수
9 . 우리의 보증
10 . 알파와 오메가
11. 어린 양
12. 맏아들
13. 임마누엘
14 . 예수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