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기쁨 / True Submission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 1:22)

현실적인 기독교 신자들의 악함에 관한 그릇된 주장들은 대단히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어느 유명한 설교자는 기독교인에 대해 은혜는 적게 받고 악마에게서는 많은 것을 받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정의를 철저히 부인한다. 그것은 거짓되고 파괴적이다. 사람들은 현실적인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존재라는 의견을 피력하는 말들을 많이 한다. 물론 그들이 죄를 범하는 것은 큰 죄악을 초래한다.

진리의 실천보다는 교리에만 열광하며, 자신의 행위와 관련된 교리보다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훨씬 강조하는 사람들은 도덕률 폐기론자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관한 교리를 받아들여 그것을 인정하고 사랑하지만 신앙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설교를 듣든지 그것에서 유익을 얻지 못하고 다만 추상적인 교리에서만 유익을 얻는 자들은 도덕률 폐기론자이다.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바로 이런 사람들에 대해 기록했다. 그들은 거룩한 생활을 하지 않으며, 신앙이란 일련의 관념들로 이루어진다고 여긴다.

하나님의 속성, 존재 양식,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 등에 관해 듣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종교적 교리는 제외시키고 다만 종교적 관습만을 강조하는 사람은 바리새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 진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복음의 근본 교리를 부인한다. 그들은 겉으로 경건한 척하며, 내면적으로는 일종의 시적인 감정의 비약을 한다.

올바른 교리는 바른 태도를 갖게 한다. 어떤 사람이 이단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면 그의 신앙도 역시 이단적이다.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믿음은 그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이단적이 된다. 혹시 관념이나 이론은 이단적인 것이지만 그의 관념이나 이론은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이나 관념을 실제로 믿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지나치게 도덕률 폐기론적인 정책에 입각하여 행동해 왔다. 교회는 추상적인 교리에만 집착하여 실천적인 교리는 등한히 하였다. 실제적인 교리보다는 실제적이 아닌 교리 안에서의 정설(正說)을 강조해왔다.

목회자가 신도들의 신앙상태를 잘못 파악할 수도 있다. 그는 실질적인 관습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추상적인 교리들에 관해 많은 설교를 하며, 그의 신도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의 양식을 얻었고 즐거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는 신도들이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신앙심이 있다는 표시는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그러한 증거는 아닌 것이다. 그가 실천적인 교리들을 설교할 때에 신도들이 스스로와 관련하여 그 진리를 사랑하며 그것을 실천함으로서 그 사랑을 나타내어야만 그 진리를 진실로 사랑한다는 증거가 된다.

제1장 미혹된 사람들.

신앙 태도에 거짓되고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가 있다. 이처럼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위선자들인데 그들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종교란 추상적인 교리들이나 소위 신앙이라는 것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여겨 선행을 그다지 또는 전혀 강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두번째는 종교를 완전히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거의 중시하지 않으며, 자기의 행위에 의해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은 형식적인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특히 이같은 유대인들의 행동을 공격했다. 그는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리와는 대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단호하게 전파했다. 그는 자신의 설교와 서신들을 통하여 이것을 부지런히 강조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라는 위대한 교리를 교회 안에 확립하였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이 교리를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해석해서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하거나 그 행위와는 상관없이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람들은 참 신앙은 항상 선행들을 이루는 것이며, 또한 그 자체가 선한 행위라는 평범한 진리를 간과했던 것이다.

종교가 오로지 표면적인 행위로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나, 또는 오로지 믿음만으로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모두 다 치우친 것으로서 그릇되고 치명적인 것들이다. 종교가 완전히 선행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선행들이 믿음에서 비롯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믿음이 없는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종교란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참된 믿음은 항상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하며, 반드시 사랑의 행위를 산출해낸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는 모두 치명적이다. 사람들은 믿음 없이는 죄사함을 받거나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며, 또한 성화(聖化)되지 못한 사람은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거나 그 즐거움에 참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죄인이 자신의 죄악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섰으며, 자기의 행위들을 할 수 있는 한 완전하게 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인 속죄에 대한 신앙이 없다면 용서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악한 행위들은 범하면서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화(聖化)되지 않은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칭의의 도구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종교의 교리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이고, 또 한 가지는 인간의 관습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교리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전자(前者)에만 국한시킨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과 존재 양식, 그리고 섭리 등에 관한 것 외의 다른 것들은 교리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실질적인 강론”을 시작하겠다고 한 것에 대해 독자들은 그 강론이 전혀 교리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그 안에 교리를 포함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내 의도는 만일 주님이 원하신다면, 실질적인 교리들에 대한 강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제 내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교리는 “참되다고 인정하면서도 스스로 실천하지 않는 신앙고백자는 스스로를 속이는 자”라는 것이다.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 중에 남을 속이는 사람과 자신을 속이는 두 종류의 위선자들이 있다. 남을 속이는 자는 도덕과 종교라는 허울좋은 외양 아래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적의를 감추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대단히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바리새인이 이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표면적인 종교적 겉치레, 구제 행위, 그리고 긴 기도 등을 통해 대단히 경건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자들이다. 이들은 정통적이고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실천을 하는 데 있어서 충실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종교가 일련의 관념들로 구성된다고 여겨 실천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참된 성결이 부족한데도 스스로 훌륭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전파되는 정통 교리를 사랑하며, 겉으로 나타난 종교의 추상적인 교리를 듣는데 즐거움을 느끼며, 하나님의 성품과 다스림에 대해 상상을 하거나 강한 느낌을 가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주의깊게 살피고 실천하지 않으며, 인간의 관습에 관련된 교리를 전파하는 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신자들은 어디에도 이러한 두 종류의 위선자들이 있다.오늘 표면적인 종교의 겉치레와 행위를 엄격히 지킴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설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진리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치 않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자 한다. 아마 우리 중에 이같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이론상으로는 믿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부인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은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품을 지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속이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들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말씀을 진실로 믿지 않는다.말씀을 듣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인정은 하지만 진심으로 믿지는 않는다. 이 점에 있어서 사람들은 스스로 속기 쉽다. 그들의 의식(意識)이 그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식이 증명해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복음적 신앙, 혹은 구원의 신앙에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 첫째, 진리에 대한 지적인 확신이 필요하다. 이것은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우리와 관련된 진리이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행동과 관련된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참 믿음은 그에 따르는 마음의 상태를 포함하게 된다. 이것이 항상 참 믿음의 본질의 일부가 된다. 사람은 자신이 이해한 것을 확신하고 자신과 관련하여 그 진리를 인정할 때에 그것을 마음으로 시인하게 된다.

둘째, 참 믿음에는 이 두 가지의 마음 상태가 반드시 필요하다. 진리에 대한 지적인 확신은 구원의 믿음이 아니다. 이 지적인 확신에 사랑이 수반되어야 구원의 믿음이 된다. 따라서 참된 구원의 믿음이 있으면 그에 따른 행위도 있게 된다. 따라서 참된 구원의 믿음이 있으면 그에 따른 행위도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 참 믿음에는 언제나 행위가 따른다. 우리의 의지가 행위를 조절하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대로 행동할 것이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이것을 믿습니까?”라고 물었는데 “예”라고 대답했다면 이 대답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지 지적인 확신인가? 아마 그는 지적인 확신은 갖고 있지만 아직 믿음은 갖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추상적인 복음의 교리들을 설교하고 있는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설교를 듣기 좋아하지만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많은 사람들이 정통 교리에 대한 설교를 듣고자 하여 교회에 드나들지만 말씀대로 행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즉 그들은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설교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에서 그들과 실질적으로 관계가 있는 진리를 설교할 때에는 그 진리를 대적하여 일어남으로서 변화되지 않은 악한 마음을 드러낸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이에 반대되는 교리는 교회들에게 대단히 해로운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는 복음의 요구에 전혀 순종하려 하지 않으면서 다만 특정의 관념들을 채택하는 것으로 자신이 경건하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로 교회를 채운다.


찰스 피니 / Charles Finney

현대 부흥 운동의 아버지인 그는 미국 코네티컷주 워렌에서 농부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법률가로서 순조로운 삶을 시작하였으나 1821년 자아와의 처절한 싸움 끝에 자신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극적인 회심을 체험하고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신학훈련을 거쳐 설교자로 변신한 그의 사역을 통해 수많은 회심자들이 나왔고 소위 제2의 대각성 운동이 뉴욕과 필라델피아, 보스턴은 물론 영국까지 강타했다. 그의 열정적인 집회, 이름을 호명하는 기도, 장시간 이어지는 집회, 구어체 설교, 여성의 대중 간증과 기도는 새로운 반향과 더불어 심한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생애 후기에 그는 오벌린 대학에서 하나님을 섬겼다.

목차

차례

서론
1. 미혹된 사람들
2. 거짓 신자
3. 의심으로 행하는 것은 죄니라
4. 참 성도
5. 율법적 종교
6.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7. 참 신자의 성품
8. 이기심
9. 순종의 기쁨
10. 사랑
11. 여론
12. 자기부인
13. 그리스도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