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영성(1) / 초대부터 12세기까지

세계의 영성신학자들이 집성한 기독교 영성신학의 결정판!




신약 성서에서 핵심적인 단어는 (Spirit, pneuma)과 신령한(spiritual, pneumatikos)이라는 단어이며, 라틴 기독교에서는 spiritualis, 또는 spiritualitas라는 단어가 잘 알려져 있었지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볼 때에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반드시 자명(自明)한 것은 아니다.
현대인들, 심지어 현대의 신자들이 볼 때에, 영성이라는 용어는 수백 년 동안 기독교의 역사를 괴롭혀왔던 바 근본적으로 부정적이고 염세주의적인 반 물질적 이해를 암시하는 함축된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올바르게 이해된 영성은, 다른 용어는 결코 포함할 수 없는 풍부한 의미의 차원 및 영역을 소유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책에서는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religion)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영성이라는 용어의 다양한 용도를 생각할 때 영성에 대해 쉽게 정의를 내리거나 보편적 동의를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기독교 영성이란 기독교 신앙을 삶 속에서 일반적인 형태로, 또는 보다 특수화된 형태로 실제로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영성은 믿음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종교적 의식과 수행 안에서 믿음이 일으키는 반응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교리와 구분된다. 또한 기독교 영성은 인간의 모든 행동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과의 보다 직접적이고 분명한 관계가 있는 행동들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기독교 윤리학과 구분된다.

기독교 영성이라는 학문은 아직까지도 하나의 분야나 정의로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다소 새로운 학문이다.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덕신학신비신학에서는 그 용어가 의도하는 바를 많이 다루고 있지만 전체를 다루고 있지는 못하다. 왜냐하면 수덕신학과 신비신학, 그리고 최근에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이라고 하는 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실질적인 체험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집합적이고 사회적인 차원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삶의 체험으로서, 그리고 그 체험에 대한 반영으로서의 영성은 금욕주의나 신비주의보다 더 광범위하고 함축적인 용어이다. 영성은 신학, 특히 오늘날 현대인들이 실천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영성은 그 나름의 독특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사(靈性史)에 관한 유익한 저서들이 많이 있지만, 이 세 권의 전집은 어떠한 논평과 설명을 요구하는 많은 방법을 지녔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첫째, 이 기독교 영성 전 3권은 구상과 실천에 있어서 완전히 에큐메니칼한 것이다. … 이 전집을 제작하기 위해 편집회의를 통해 모든 장벽을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우리에게 공통점이 얼마나 많은지를 서로 이해하게 되었다. 바로 이 편집회의가 에큐메니칼적이었다.

둘째, 이 책의 편집에 있어서 논문들의 논조, 그리고 그 논문들을 읽을 대상이었다. 우리의 의도는 이 책들이 일반 독자들, 특히 기독교 영성사에 관한 확실하고 분명한 기록을 발견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려는 것이었다. 또 비록 이 논문들이 세밀하고 학구적인 것이 아니라 해도, 우리는 이 논문들이 원래의 기고문에서 제시된 문제들에 관해 숙고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진보된 지식을 제공하여 유익을 주기를 원하는 바이다.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에서는, 특히 각주와 참고 문헌과 같은 학문적 장치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 불가피하게 상당한 차이점이 등장한다. 그러나 각각의 논문들이 전체적인 구도의 틀 안에서 자체의 기본적 역할을 성취하는 한, 이러한 다양성은 긍정적인 특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전집에 수록된 각 책의 형태와 각각의 논문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보다 상세한 논평이 요구된다. 비록 각각의 책들은 유익한 참고도서 역할을 하도록 의도되었지만, 그것들의 주된 목적은 기독교 영성사를 개관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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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수도원 운동과 금욕주의


1. 동방 기독교 / 쟝 그리보몽(Jean Gribomont)

수도원 운동의 영적 생명은 본질적으로 인간 의식의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의 가시적 표현들은 제도들 안에서, 사회적, 정치적 행동 안에서, 건축과 예술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헌들 안에서 발견되는데, 이 문헌들은 우리가 이제 검토하려는 시대에 있어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이다. 아주 초기 시대는 가장 중요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거의 그 시대에 접근할 수 없다. 후일 각 지방의 경계 내에서의 표현에 어느 정도 통일성이 나타난다. 결국 논리적인 연구 계획은 연대적 순서보다는 지리적 범위에 따라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항상 가장 본질적이거나 가장 귀중한 정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종합(synthesis)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하기에 앞서 사실적이고 복합적인 역사적 묘사를 하려는 시도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사실들과 인물들에 관한 기록들을 소유하고 있다.

출발점: 그리스 세계의 동부 311년 이후, 콘스탄틴의 평화가 효력을 발휘하고 기독교인 주민들이 제국의 사회적, 문화적 구조에 적응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전통적인 세속적 가치관에 대한 거부를 다양한 표현한 방법으로 하나의 운동이 발생했다. 북아프리카의 서쿰켈리안(Circumcellian)들의 경우처럼 이러한 운동은 흔히 극단적인 이단이나 반역의 형태로 변질되거나, 역으로 당국에 충성하며 지혜롭게 지원했다. 이 운동의 최초의 출발점은 아주 먼 과거의 시리아인들과 콥트인들 중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들의 복음화의 기원은 유대-기독교 전통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것은 독신제도, 금욕, 금식, 기도 시기, 청빈 등의 규칙을 지키는 점에 있어서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 공동체들의 관습보다 덜 형식적이지만 더 엄격했다.

324년경에, 그리고 344년 및 그 이후의 시기에 이집트의 기독교 파피루스에는 monachos(수도사)라는 용어 및 그것의 파생어들과 동의어들―apotaktikos(자신을 부인하는 사람), 은자(anchorite), 또는 단순히 형제―이 등장했다. 이 파피루스들은, 그러한 사람들이 종교적 명성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 즉 그들이 권력자들을 대적하여 교회 정치에 개입할 뿐만 아니라 복을 주고 중재 기도를 할 수 있었음을 증거해준다. 이러한 용어들은 순수한 그리스어인데, 콥트 방언과 병행하여 채택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환경에서 사용된 사부(abbot)라는 단어의 어원이 시리아어였던 것처럼, monachos도 단일한 혹은 혼자 등을 의미하는 시리아어 전문 용어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이 운동의 주요 강조점은 독신 생활이었다. 그러나 처음에 그 운동의 주된 목표는 성적(性的)인 이원성에 반대되는 것인 내적인 통일성, 심지어 하나님의 독생자와의 합일을 획득하는 데 있었다.

이집트 수도사들의 명성 덕분에 기독교 세계 전역에 그들이 사용한 어휘들과 개념들이 퍼지게 되었다. 사실 그 운동은 여러 지방에서 독립적으로 생겨났으므로, 이집트만을 근거지로 해서 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집트의 운동을 본보기로 하여 발달되었다. 즉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로부터 크게 혜택을 입었다.

소아시아의 동부, 메소포타미아 상부 근처에도 금욕고행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멀리 당시 건설 중에 있던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방랑했다. 357년에 세바스테(Sebaste)의 감독 에우스타티우스(Eustathius)가 고무한 이 운동은 제국의 궁전에 있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갠그라(Gangra)에 종교회의를 소집하고(340년경), 금욕적 공동체 내에서 발견되는 규칙 부재를 호되게 정죄했으며, 동방 지역의 동료인 아르메니아의 감독들을 설득하여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유스타티우스를 정죄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종교회의에서 유스타티우스의 무리가 결혼, 가정생활, 사회 질서, 성직자 등의 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비난한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을 받은 부인들은 남편에게서 스스로를 해방하고,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자신을 해방했으며, 노예들과 군인들을 순종을 거부했으며, 교회법이 무시되었고, 성직자들의 경제적 권리가 무시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병자들을 돌봄으로써 열렬한 사랑과 헌신을 획득했다.

세상에서의 삶을 부적당한 것인 듯이 보이게 만든 종말론적 약속들 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사막에서 발생한 위대한 사건들(출애굽, 선지자 엘리야의 삶, 세례 요한, 그리스도의 40일 금식)은 새로 회심한 사람들을 팔레스틴으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팔레스틴의 금욕고행자들의 수효는 360년부터 증가하기 시작했다. 에테리아(Etheria)는 성지 순례 도중에 도처에서 금욕고행자들이 도처에서 전례와 여행자 숙소를 세우고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안토니의 신화(神話)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 후 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능력이 없었던 무식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신약 성서의 여러 책들을 기록했고, 이 본문들은 신자들의 공동체 덕분에 유명한 고전들보다 더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수도원 운동의 초기에 발생했다. 무식한 사람들은 구전 전승들을 입수하여 보존했는데, 후일 수도사들은 그것들을 기록하면서 자기들이 발달시켜온 수도원 제도들과 부합하지 않는 것들은 생략했고, 개인적으로 전승의 기사들을 해석하거나 가필하기도 했다.

널리 유포된 최초의 본문은 분명 『안토니의 생애』이다.9) 이 전기는 문화와 지식에 해박한 인물이었으며 이집트 교회의 불굴의 지도자였던 아타나시우스의 저서였다. 황제에 의해 유배되어 사막에 은신했던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의 영웅적 행위를 거의 무조건적으로 인정했다. 동시에 그는 금욕의 참된 의미를 깊이 의식하고 안토니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일련의 규칙들의 초안을 저술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가 106세에 사망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그 성인이 270년경에 사막으로 들어갔음을 전제로 한다. 만일 아타나시우스가 안토니의 수명을 과장했다면, 안토니가 수도 생활을 받아들인 시기는 아마 300년 직전일 것이다.

부유한 농부의 아들인 안토니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세상 재산을 모두 포기했다. 안토니는 처음에는 자기가 사는 마을 근처에 사는 겸손한 금욕고행자들을 모방하는 생활을 했지만, 점차 더 깊은 독거와 금욕 생활에 들어갔다. 악령들의 시험을 정복한 그는 기도의 능력과 기적들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크게 존경을 받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본받으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타나시우스는 분명히 안토니의 실제의 삶을 그대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의 전기에 수록된 일부 내용은 신플라톤주의자인 포피리(Porphyry)와 얌블리쿠스(Iamblichus)가 피라고라스의 전설에서 처음으로 생각했던 유명한 본보기를 상기시킨다. 아타나시우스는 주인공의 스스로에게 부과한 침묵, 자원해서 선택한 가난, 초인적인 지혜, 심리적 안정성 등을 강조했다. 안토니가 세상과 결별하면서 겪은 격렬한 내면의 갈등이나 비통함에 대한 암시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 그리스도, 인간의 마음에 대한 안토니의 지식은 한층 더 밝게 두드러진다.

이 전기에서 아타나시우스는 이야기와 설교를 번갈아서 사용하는데, 설교는 분명히 이 신학자인 전기작가 고유의 사상들이다. 최근에는 그 은수사의 7편의 “편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데, 이 편지들은 정말로 안토니가 쓴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지만, 그리스어 환역본에는 빠져 있었다.10) 이 편지들은 다소 혼란스러운 방법으로 금욕 훈련과 예수 기도(Jesus prayer)를 통해서 타락하기 전의 인간이 지니고 있던 바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그대로의 순수한 지성으로서의 인간의 본성을 재발견한다는 “영지주의적” 개념을 개진했다. 만물이 구속함을 받는 날, 성육신에 의해 회복되어, 인간성은 태초에 지니고 있던 완전한 상태를 회복할 것이다. 이 순수히 지적인 실재가 날마다 이루어지는 영적 진보를 결정한다. 안토니는 이 주제를 택했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는 오리겐주의적 편견들을 제거한다.


2. 서방 기독교의 성례와 전례 / 피에르 마리 기(Pierre-Marie Gy)


우리는 주요한 성례들을 하나씩 구분하여 취급하지 않고 성례의 영적 역사에 있어서의 여러 상이한 순간들을 살펴보려 한다. 우리의 목적은 힙폴리투스, 암브로스, 어거스틴 등이 활동한 시대, 로마의 위대한 성찬중시론자들의 시대, 카롤링 왕조 시대와 그 이후 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12세기의 성례전 영성의 내적 접합(articulations)을 파악하는 데 있다.

그리스어로 행해진 로마 최초의 전례: 로마의 힙폴리투스의 Apostolic Tradition

『사도 전통』(Apostolic Tradition)의 저자는 분명히 힙폴리투스(Hippolytus)이다. 그는 로마인 사제요 조그만 분파적 공동체의 창시자로서 235년에 교황 폰티아누스(Pontianus)와 함께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그의 저서(그리스 원어로 된 것은 유실되었음)에서는 그가 구상한 전례와 그 자신의 개인적인 신학적 사상에 따라서 재구성한 전통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이 문서의 중요성은, 3세기초에 로마에서의 기독교 전례(그리스어로 거행됨)의 상태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전례를 최초로 신학적으로 종합했다는 것(이것은 후일 특히 동방에서 널리 영향을 미치게 된다). 3세기의 두 명의 중요한 기독교 교사인 로마의 힙폴리투스와 동방의 오리겐은 완전하게 발달된 구조를 지닌 유대교 기도를 마련한 랍비들의 적수였다.

기독교 영성에서, 세례는 가장 중요한 성례였다. 왜냐하면 여러 차례의 박해에도 불구하고(혹은 박해 때문일 수도 있다) 기독교는 신속하게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터툴리안은 “기독교인들의 피는 씨앗이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것이 교인들의 숫자를 증가시킨다는 뜻이다(Apology 50.13). 세례 받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른들이었다. 그리고 터툴리안의 반대되는 권고―이것은 “기독교인들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그의 정식으로 요약되었다―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 부모의 자녀들은 어렸을 때에 세례를 받았다(Apology 18.4). 4세기에 입증된 바와 같이, 기독교 가정의 자녀들이 장성한 후에야 세례를 받은 것은 초기 기독교 관습을 영속적인 보존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속죄의 고행을 요구받는 데 대한 두려움에 기인한 것인 듯하다.

세례 의식은 이미 개인적인 회심, 가르침, 축귀 등 준비 기간을 갖춘 공산주의적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준비 기간에 이어 부활절 전날 밤에 세례 의식이 거행되었다. 교리 문답 준비 과정에 입문하려면, 복음에 일치하지 않는 모든 생활방식을 버려야 했다. 세례 의식들은 일련의 예식으로 구성된 하나의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실제의 성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신앙을 묻는 삼중적 질문과 세 번 물에 들어가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서방에서는 다른 세례 정식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가, 7세기와 8세기에 이르러 신앙의 질문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는 정식―이것은 삼위일체에게 기원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성령 강림을 구하는 기도의 특성을 보존하고 있다―이 결합되었다. 세례에 이어 두 차례의 기름 부음(사제가 행하는 것과 주교가 행하는 것), 안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세례식 및 그 후에 이어지는 의식들이 거행되는 동안 드리는 기도들은 삼위일체의 행위를 표현했고, 죄사함과 중생이라는 세례의 결과와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 안수하는 것을 구분했다(Hyppolytus, Apostolic Tradition 21). 힙폴리투스가 사용한 구분은 세례의 효과는 오로지 죄사함뿐이라고 주장한 터툴리안의 구분보다 훌륭한 것이다.

힙폴리투스의 견해에 따르면, 성찬은 2세기라는 틀 안에 위치하는데, 그 틀에 따르면 eucharistia라는 단어는 떡과 포도주를 놓고 드리는 감사기도, 그리고 “성체화된”(eucharistized) 떡과 포도주 자체를 지칭했다. 모든 성체 영성에 필수적인 것인 바 성찬 기도와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연결짓는 일이 사라졌다. 이는 동방에서는 성찬이 하나의 의무로만 간주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고, 서방에서는 로마 교회의 관습 때문이었다. 한편 이것은 eucharistia의 두 가지 의미를 묘사하기 위해 두 개의 표현을 제공했다. 기도는 gratiarum actio라고 불렸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eucharistia라고 불렸다(중세기에 서방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eucharistia가 감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했는데, 그러한 의미는 르네상스 시대에 재발견되었다).

힙폴리투스는 성찬이 지닌 이 두 가지 측면을 다루면서, 유대교의 기도와 상반되는 기독교의 독창성을 드러내려 했다. 그의 시각에서 볼 때, 유대교와 기독교는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지만, 감사를 드리는 것과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만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만이 성자, 즉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선물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Against the Heresies 14). 따라서 성찬이 새 언약을 숭배하는 근본적인 행위가 되는 것은 성육신 때문이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육신이 되신 예수의 살”이며, 또 그렇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를 드린다.

『사도전승』에 수록된 성찬 기도의 본문은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기도의 통일된 본질(이것은 일련의 유대교의 감사 기도와 반대가 된다), 그리고 기도의 통일성을 촉구하는 동기가 될 수 있었던 삼위일체적 구조이다. 랍비들이 감사기도(berakah)에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는 데서 절정에 달하는 바 구원하시는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분명한 구조를 부여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힙폴리투스는 자신의 몸과 피를 주신 구속주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 드리는 감사인 성찬을 고안했는데, 그 다음에는 성령을 구하는 기원이 이어지며, 마지막으로 교회 내에서의 삼위일체 찬양이 이어졌다. 힙폴리투스의 견해에 따르면, 이렇게 성령을 구하는 요청은 아직 떡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을 요청하는 성찬식 기도(epiclesis)로 발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를 찬미하고 그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곳이며 성령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장소인 교회에 대한 정교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Apostolic Tradition 35). ekkl?sia라는 단어는 교회 공동체와 신약 성경에서처럼 기도하면서 모인 교회를 지칭했다(이 단어는 3세기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교회 건물에 적용되었다). 성령께서 교회(ekkl?sia) 안에서 활발히 활동하시기 때문에, 교회로 가야 했다.

서방 세계에서의 전례: 암브로스와 어거스틴의 시대

비록 2세기 중엽에 이르러 아프리카가 아니라 로마에서 기독교인들의 라틴어 사용이 시작되었다는 학설이 이제 확립되었지만, 라틴 세계가 전례를 받아들인 것은 3세가 중엽부터 4세기 후반 사이의 어느 기간이었다. 정확하게 4세기 후반에 전례와 교부들의 요리문답서의 기본 구조를 형성하는 주요한 성찬 기도 본문들이 동시에 출현했다. 한편 이러한 요리문답서의 저자들은 성례전 신학과 영성을 다룬 교부로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4세기 이후의 성찬 기도 본문들을 식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로마의 성찬 기도문과 최소한 암브로스가 지은 네 편의 찬송을 다룬 최초의 역본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암브로스는 로마의 prex에 대해 주석했는데, 성찬 기도 본문과 비교할 때에 그의 논문은 독창적이다. 만일 그가 로마의 미사 전문(典文)을 인용하지 않았다면, 그의 가르침을 토대로 그것을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활절 주간에 행한 그의 성례적 요리문답을 보여주는 두 개의 문헌이 현재 남아 있다: 그가 구두로 행한 것을 필사한 것인 『성례에 관하여』(De sacramentis, 여기에는 로마의 미사 전문이 인용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설교를 토대로 한 작품인 De Mysteries. 이 두 문헌은 흥미로운 차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입문식이라는 개념을 의지한 것은 현장에서 행하는 설교가 지닌 자연스러운 요소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학적 기교였음을 보여준다(이 사실은 어거스틴에게도 적용된다).

4세기에 부활절 세례 준비 기간이 발전하여 생겨난 것이 사순절이다. 서방의 전례에서 이 기간은 사마리아 여인(요 4:5-42), 날 때부터 장님인 사람(9:41), 나사로의 부활(11:1-46) 등 요한복음에서 인용한 세 개의 인용구를 뼈대로 구성되었다. 우리는 로마서 6장을 세례에 적용한 것과 이것을 비교할 수 있다. 로마서 6장은 초대 교회의 세례 신학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세례에 의해 완전히 감화를 받고 있던 시리아의 세례 전통에서 그 때까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었다. 속죄(penance)와 관련하여 주요한 복음적 패러다임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열쇠의 능력을 수여한 것이라기보다는 닭이 울 때에 베드로가 회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 때문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인했던 사람들(lapsi)을 위한 회개의 본보기가 되었다.

세례를 받고 나서 안수하는 동안에 행하는 로마 교회의 기도는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이사야 11:2에 열거된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를 부여 받게 되기를 구했을 가능성도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물과 성령으로 당신의 종들을 중생케 하셨으며, 그들에게 죄사함을 주시고…당신과 함께 살고 계시며 성령과 더불어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혜사 성령을 부어주시며 지혜와 총명의 신을 주시는 분”(Gelasian Sacramentary n. 451; On the Sacraments 3.8). 밀라노에서 채택된 가톨릭의 성찬 기도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에서 따라야 할 모든 것들 중에서 기독교적 성찬의 희생제사적인 면을 가장 강조한 것이었던 듯이 보인다. 힙폴리투스의 성찬식문(anaphora) 및 이것의 영향을 받은 것들과는 대조적으로, 이 기도는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성령에 대한 특별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 기도에서는 성찬물의 엄위한 특성(tremendum)을 전혀 강조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후일 안디옥파의 성찬식문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동방에서는 4세기부터 낮은 음성으로 기도문을 암송하는 일이 행해졌지만, 서방에서는 8세기에 로마보다는 프랑크족 국가에서 이러한 기도가 등장한 이유를 설명해줄 것이다.

서방 영성을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암브로스의 요리문답과 어거스틴의 요리문답은 그들이 속한 지역 교회들 사이의 차이점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의 상이한 인격에 의해서 구분된다. 이 경우에 어거스틴은 암브로스에게서 세례를 받고 입문한 예비 신자이기보다는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을 존중하는 한편 도나투스파를 대적하는 입장을 취한 아프리카인 감독이다. 어거스틴과 암브로스는 그 시대의 다른 주요 기독교 저자들과 더불어 입문에 대해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처음 생겨난 이후로 기독교적 견해의 일부였던 원리들을 소유한 성례들을 다룬 성경적이고 교회적인 요리문답(catechesis)을 공유했다. “입문”(성례로의 입문이 아니라 성례에 의한 입문)은 점진적인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성례 존중의 행동들 안에서 마음의 눈은 믿음의 빛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참여하게 하시기 위해 주신 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적인 실체들을 발견했다. 이것은 교부들이 기독교적이라고 인정했던 플라톤주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기독교적 해석을 따르자면,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중요한 구원의 행위들은 새 언약의 성례 안에서 발생하는 것의 상징이요 예표(豫表)이다. 만일 현대인이 이러한 예표론을 크게 의지하고 있는 성찬식문이나 요리문답(예를 들면 그 기원을 5세기로 볼 수 있는 바 사제를 임명할 때 행하는 서방 교회의 기도)을 읽는다면, 종종 구약 성경으로 돌아가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의 역도 성립된다: 일반적으로 초대 기독교에서는 신약 성경을 예시하는 구약 성경의 분명한 역할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그 자체의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가치는 기독교적 실체들에 대한 하나의 설명 안으로 사라졌다.

성례의 교회적 차원과 관련하여, 교부들은 세례와 성찬은 먼저 교회를 만듦에 의해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모교회(church-mother)를 만듦에 의해서 기독교인들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 교회는 전체 공동체이며, 또 세례에 의해서 새로운 자녀들을 낳는다. 교회는 다른 성례들, 예를 들면 참회자들의 화해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개개인의 영적 운명을 다루기 이전까지만 해도 교부들의 성례 존중의 요리문답은 교회론적이었다. 요리문답과 신학적 접근 방식의 역전은 12세기 이후로 전개되었다.

암브로스와 어거스틴은 각기 이처럼 보다 일반적인 맥락 안에 나름의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성찬과 관련하여, 암브로스는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서 변화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의 예표들을 사용했다. 특히 그는 성찬식 기도에서 사제가 드린 기도문의 표현과 그리스도께서 친히 중심에 세우신 것들을 분명히 구분했다. 그는 그것들은 사제가 인용한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설명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설명했다(On the Mysteries 5.4). 이러한 성별의 기도를 드리기 전, 제단의 떡과 포도주는 평범한 떡과 포도주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별의 기도를 드린 후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 이와 같이 암브로스는 새로이 발달되고 있는 성찬 성별의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성찬의 영성은 떡과 포도주를 엄위한 것으로 보는 것보다 선행한다(혹은 이러한 개념에 반대한다). 그는 성찬 경험을 강력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아가서를 의지한다.

어거스틴의 성찬 존중의 영성은 매우 다른 방향으로, 즉 훨씬 더 교회론적으로 발달했다. 그의 영성에서는 그리스도의 역할을 다른 방식으로 취급한다. 그는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것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데, 이것은 서방 세계로서는 약간 놀라운 사실이다. 이것은 후일 암브로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어거스틴의 초점은 성찬에 의해서 양육되는(어떤 면에서는 만들어지는) 교회적인 몸으로 재빨리 옮겨갔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 제단 위에 놓인 이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잔,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거룩하게 된 바 그 잔에 든 것은 그리스도의 피이다. 만일 당신이 합당한 상태에서 그것들을 받는다면, 당신이 받은 것은 당신 자신이 된다”(Sermon 22).

우리는 성찬에 대한 이 교회론적인 견해(이것은 로마의 전례에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중세 시대의 성찬 신학에는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를 어거스틴의 시편 해석과 비교할 수 있다. 이번에도 그의 해석과 암브로스의 해석 사이에는 놀라운 차이가 있다. 암브로스는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중시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도시를 기쁘게 해 주는 강이시니 그리스도를 마시라. 그리스도는 평화이시니 그리스도를 마시라. 당신을 대속하신 피를 마시려면 그리스도를 마시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시려면 그리스도를 마시라”(Commentary on Psalm 1 n. 33). 반면에 어거스틴은 머리인 그리스도 및 그와 연합한 교회적 몸 전체의 기도하는 음성이 시편이라고 간주했다: 성자의 몸은 기도할 때에 그 머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만이 “자기 몸의 구주”,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며,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며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신다. 그분은 우리의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 있는 우리의 음성과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음성을 인정해야 한다.(On Psalm 85, n. 1)

그래서 암브로스의 시편 해석과 그의 성찬 신학 사이에는 상호 관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 비록 어거스틴의 시편 해석은 성찬 자체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그 후 몇 세기 동안 발휘했지만, 그의 시편과 성찬에 대한 접근 방식 안에서도 비슷한 통일성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시인인 암브로스는 서방 교회 전례 찬송의 주요한 형태를 확립했다. 그것은 성가 영창(특히 수도원의 성무일과에서의 영창)을 밀어낸 것이 아니라 보완했다. 동방에서는 찬송이 성가 영창을 어느 정도 대신했었다.

중한 죄를 위한 것으로서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었던 고대 기독교의 참회 의식들은 전례와 관련된 영성의 주제와 거의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전체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용서함을 구한 것은 예외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회개의 보속을 일반적인 영성, 특히 수도원 영성과 결합하려 했다. 우선, 그는 기독교적 삶 전체 안에서 회개의 행위에 중요한 역할을 할당함으로써, 기독교가 지닌 참회의 국면들을 이제 두 단계(세례 때의 회심과 성례 때의 회개)가 아니라 세 단계로 재구성할 것을 제안했다(Sermon 352). 그는 여기에다가 세상에서의 자신의 마지막 날에 대한 참회의 기도를 추가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그의 친구 포시디우스(Possidius)가 자세히 이야기한다: 그는 우리와 개인적인 대화를 하는 동안에 세례를 받은 후에는 비록 칭찬받을 만한 교인들과 사제들일지라도 공정하고 타당한 회개를 행하지 않고서 이 세상을 떠나서는 안된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회복되지 못할 중병에 걸려 앓는 동안에 친히 이 일을 행했다. 그는 다윗의 참회의 시편들을 다시 복사시켰는데, 그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는 병상에 있는 동안 벽에 붙여 놓은 네 개의 시편을 쉬지 않고 읽으면서 한없이 울었다. 그는 죽기 열흘 전, 우리에게 자신의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도록 자기 방에서 나가 달라고 부탁했다…우리는 그의 뜻을 존중해주었고, 그는 내내 기도에 몰두했다.(Life of Augustine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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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각 시대와 다양한 운동(Periods and Movements)

제1부는 대략 기독교 시대의 100년에서부터 1200년경에 이르기까지는 기독교 영성의 발달의 주요 단계들을 제시하려는 목적을 지닌다. 12세기를 제1부의 종착 시대로 선정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근거에 입각하여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에큐메니칼 관점에서 볼 때,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의 불화가 수세기 동안 심화되어왔지만, 13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결코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13세기에 이르러 제4차 십자군이라고 부르는 비극―이것을 에큐메니즘에 도전한 커다란 죄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이 발생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라틴 정복과 동방의 굴복이 이루어졌다.

서방 영성의 관점에서 볼 때, 12세기의 풍부하고 독창적인 논문들은 동방 기독교와 라틴 기독교가 공유하는 과거 교부시대를 창조적으로 요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능 안에서만 활용될 수 있었다.

12세기 영성의 대변인이며 후대의 개신교도들과 카톨릭 교도들 모두의 존경을 받는 작가인 클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가 최후의 교부라고 불린 것은 근거 있는 일이다.

제2부 주제들과 가치관”(Themes and Values)

제2부에서는 제1부에서 다루었던 시대에 기독교 영성에 의미를 부여한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많은 주제 중에서 이러한 주제들을 선정하는 일은 편집위원회가 직면한 가장 어려운 과업 중의 하나였다. 지면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선정 기준을 세웠다.

첫째는 기독교의 처음 12세기 동안의 영성 생활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주제가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였다. 둘째는, 그것이 기독교 신앙과 실천의 영속적인 영적 보화의 중요한 일부로 존속하는가의 여부이다. 각각의 주제에 대해 충분한 연대별 논문들을 제공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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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및 저자에 관하여

Bernard McGinn, John Meyendorff, Jean Leclercq 등 세 명이 책임 편집자의 역할을 했으며, 각 주제 및 논문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목차에 나와 있는 저자의 이름을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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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참고문헌
약어표

제1장 성서와 영성 / Sandra M. Schneiders

제1부 각 시대와 다양한 운동

제2장 초기 기독교 공동체 / John D. Zizioulas
제3장 영지주의 영성 / Robert M. Grant
제4장 위대한 교부들의 영적 메시지 / Charles Kannengiesser
제5장 수도원 운동과 금욕주의

1. 동방 교회 / Jean Gribomont
2. 서방 교회 / Jean Leclercq

제6장 위-디오니시우스의 영성 고취 / Paul Rorem
제7장 기독교와 문화적 다양성

1. 시리아어권 기독교인들의 영성 / Roberta C. Bondi
2. 켈트족과 게르만족 사회의 영성 / Pierre Riche

제8장 그레고리의 개혁 / Karl F. Morrison

제9장 12세기의 종교 세계

1. 서론 / Bernard McGinn
2 켄터베리의 안셀름과 그의 영향 / Benedicta Ward
3. 시토회 수도사들 / Basil Pennington
4. 수사 신부들 / Grover A. Zinn


제2부 주제와 가치관

제10장 그리스도의 역할

1. 동방 교회: 구주이신 그리스도 / Jean Meyendorff
2. 서방 기독교: 구주이신 그리스도 / Bernard McGinn

제11장 삼위일체

1.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 Thomas Hopko
2. 서방 교회의 삼위일체론 / Mary T. Clark

제12장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1. 동방 교회 / Lars Thunberg
2. 서방 교회의 영성 / Bernard McGinn

제13장 은혜: 어거스틴적 기초 / J. Patout Burns
제14장 전례와 영성

1. 동방 교회의 전례 신학 / Paul Meyendorff
2. 서방 기독교의 성례와 전례 / Pierre-Marrie Gy

제15장 성상과 예술 / Leonid Ouspensky
제16장 기도와 관상의 길

1. 동방 교회 / Kallistos Ware
2. 서방 교회 / Jean Leclercq

제17장 초대 교회의 순결관 / Peter Brown
제18장 영적 지도 / Sr. Donald Corcoran
제19장 기독교적 삶의 실천: 평신도 계층의 탄생 / Jacques Fontaine

저자 소개 / 779 색인 / 783